2018년 5월 3일 목요일,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 가족여행 3일차이자 우리 부부의 결혼 21주년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이 곳 라부안 바조(Labuan Bajo)를 출발해 구글 지도 상에서 약 1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나오는 루뗑(Ruteng) 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다. 승용차로는 약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걸로 나온다.
개인 차량 렌트 대신에 Gunung Mas 라는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아직까지 예약을 못한 관계로 가까운 Pagi 호텔 근처 터미널에 가서 루뗑까지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고 선택하기로 한다.
오전 8시 반경에 호텔 체크아웃을 한 다음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식사 코너에서 샌드위치에 잼을 발라 가볍게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그런 다음 집사람과 가방 하나씩을 챙겨들고 Pagi 호텔 근처 터미널로 이동한다. 구글 지도 상에서 볼 때 이 곳 호텔에서 불과 2~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곳이다.
아직 이 곳 터미널에 와본 적이 없는 터라 Gunung Mas 시외버스 비슷한 버스들이 정차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작 도착하고 보니 버스는 전혀 보이지 않고 몇 대의 밴형 승용차만 주차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근처에 있던 대여섯명의 현지인들이 달려와 우리 부부를 에워싸고는 루뗑(Ruteng)? 바자와(Bajawa)? 등 이 곳에서 갈 수 있는 목적지들을 속사포같이 연발한다.
잠시 이들을 진정시킨 다음 우리 부부는 루뗑까지 가려하는데, 이 곳이 터미널이라 하기에 버스가 있는 줄로 알고 왔는데 그게 아니라서 Gunung Mas 버스를 타러 갈 예정이라 말하니....
여기서 Gunung Mas 버스 터미널까지 가려면 4만 루피아(약 3천 2백원) 택시비를 내야 하고, 또한 루뗑까지 버스비가 1인당 11만 루피아(약 8천 8백원)인데 자기들 승용차로는 1인당 10만 루피아에 버스보다 더 빨리 루뗑까지 태워준다는 거다.
개인 차량 렌트해서 이동할 생각도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니 나쁠 것 같지가 않은데 정작 이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가 더 걱정이다. 한 사람은 아예 차량을 몰고 우리 부부 옆에 다가와서 타라고 연발하기에 할 수 없이 이 승용차에 타기로 한다. 우리 두 부부만을 위해 루뗑까지 갈거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모객이 될 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가 미지수이다.
우리 부부가 타기가 무섭게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모객 상황을 확인하더니 시내를 2~30분 돌아다니며 두 명을 더 픽업해 모두 4명의 승객을 태우고서 오전 9시 반경에 라부안 바조를 출발한다. 운전자와 그 옆 조수석에 승객 1명이 타고, 중간 열에는 우리 부부가 타고 있으며, 그 뒤에는 승객 1명과 보조 운전사 1명이 탑승하고 있다. 장거리 운전이다 보니 운전자가 졸릴 때 이를 대신할 보조 운전사가 필요한 거다.
오전 10시 15분경 운전자가 도로 옆에 잠시 차를 정차한 다음 담배를 사러 간다면서 작은 가게에 들어간다. 집사람이 우리도 생수나 한병 사오라기에 내려 생수 두 병을 주문하면서 루뗑까지 안전하게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운전자의 담배값까지 합쳐 24,000루피아를 지불한 후 생수까지 한 병을 건네니 고맙다 인사하네요.
오전 11시 15분경 렘보르(Lembor) 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식당 앞에서 차를 멈춘다. 약 1시간 45분 정도 운전을 한 터라 잠시 휴식도 취하고 이 곳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떠날거라 하더군요. 우리 부부도 아침 식사가 부실했던 탓에 이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미트볼 수프(Baso라고 부름) 하나랑 파당식 식사 1인분을 주문한다. 파당식 식사는 수마트라 파당(Padang) 도시의 전통적 매콤한 소스를 이용해 만든 고기, 생선, 계란, 야채 등 여러가지 요리들 중에서 먹고 싶은거 골라 담으면 그 단가들을 더해서 계산을 하는 식사이다.
바소 하나랑 파당식 밥 한접시 해서 모두 45,000 루피아(약 3,600원)에 불과하다. 집사람은 마실거리로 5천 루피아짜리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나는 냉장고에 든 1만 루피아 짜리 찬 음료수를 하나 고른다. 마침 운전사가 파당식 식사 접시를 들고 계산하려고 서 있기에 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 2만 루피아(약 1,600원)라기에 이 것 마저 내가 계산해 드린다. 아까 담배랑 생수를 사준 것도 있는데 이것 마저 내가 계산하니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한다.
오전 11시 40분경 식사를 마치고 모든 승객들이 탑승하자 렘보르를 출발해 루뗑으로 향한다. 여기서 부터는 보조 운전사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자는 차량 맨 뒤칸에 탑승해 잠을 청하기 시작하더군요.
중간에 차량이 주 도로를 빠져 산길로 향한다 싶더니 자그마한 산골 마을에 도착해 조수석에 앉아 계속 타고 온 승객을 내려준다. 아마 도시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돌아오는 아빠인 듯 한데 어린 자녀들까지 마중 나와서 반기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하고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강아지들까지 여러마리 몰려나와 반기는 걸로 보니 전형적인 시골 마을 모습이라 정겹기만 하다.
다시 차량은 산길을 되돌아 내려가 주 도로에 합류한 다음 루뗑을 향해 계속 달린다. 20여분 지나 다시 도로 가에 차를 세우더니 한 승객과 짐들을 내려준다. 무거운 짐도 있는데 왜 집까지 태워다 주지 않는 걸까 생각하는데 마침 오토바이를 몰고 온 가족을 만나더군요. 이제 승객은 우리 부부만 남은 상황이다.
오후 1시 20분경 찬차르(Cancar) 마을에 도착한다. 아직 루뗑까지는 30분 정도 더 가야하는 데 우리 부부는 이 곳에서 내리기로 한 거다. 거대한 방사형 논(인도네시아어로 Lodok Cara라고 함, 거미줄 논)을 구경할 예정인데, 다른 승객은 없고 우리 부부만 남은 터라 운전자와 흥정을 시도한다. 우리 부부가 30분 정도 방사형 논을 구경하고 오는 동안 여기서 기다렸다가 루뗑까지 마저 태워다 주는 걸로 해서 추가 10만 루피아를 제의했는데 흥정은 너무나 싱겁게 끝나고 만다. 그렇게 하라는 거다.
이렇게 쉽게 흥정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흥정이었기 때문이다. 엊그제 라부안 바조의 호텔 직원 알렉스가 자기의 고향인 이 곳 찬차르에서 루뗑까지 가는데 베모를 타면 두사람이 7~8만 루피아 정도 차비가 들거라 했는데, 우리 부부가 따로 루뗑까지 이동하려면 이 돈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2~3만 루피아 더 내고 편한 승용차를 타고 가는게 더 나은거지요. 마찬가지로 얘네들도 우리 부부를 여기 내려준 다음 빈 차로 라부안 바조로 되돌아 가진 않을거 같고, 루뗑으로 가서 손님들을 다시 모아 태운 다음 라부안 바조로 돌아갈거니 여기서 30분 기다리고 공돈 비스무리한 10만 루피아가 더 생기니 괜찮은 조건인 거지요.
방사형 논을 구경하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 공터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우리 부부만 내려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입구에서 입장료이자 후원금 명목으로 1인당 15,000 루피아를 내라기에 서슴지 않고 3만 루피아를 지불한다.
5분 정도 계단을 따라 자그마한 언덕에 올라서니 찬차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쪽으로는 방사형으로 된 거대한 논들이 펼쳐진 장관을 구경할 수가 있다. 약간 날씨가 흐린 편이라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니 좀 어둡게 나와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만, 직접 눈으로 구경하기에는 맑은 날씨보다 더 또렷하게 보이는 느낌이다. 방사형으로 된 논은 추수가 끝나 버리면 제대로 구경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고 일부는 푸른 색깔을 띄고 있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방사형 논을 구경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기에 찾아온 거네요.
계단 입구에서부터 신기한 듯 우리 부부를 안내하며 언덕에 함께 오른 두 명의 어린이, 방과 후인지 아니면 학교 수업을 빼먹고 부모님들 몰래 담배를 피러 온 학생들과 함께 단체 사진도 찍으며 흥겨운 20여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우리 부부가 언덕에 도착하니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고 있었거든요. ㅎㅎ
방사형 논 구경을 마치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어린이 두 명은 여전히 우리 부부를 안내하며 계단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조심하라 하고 심지어 노래도 불러준다, 승용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차 뒤에 서서 운전자가 듣건 말건 후진하는 차량의 방향을 안내하기도 한다.
두 명 모두 천진 난만한 거 같아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서 5천 루피아(약 400원)짜리 두 장을 건네니 손사레를 치면서 안받으려 하더군요. 다시 건네면서 받아도 괜찮다고 하니 그제서야 다가와 한 장씩 받아가더군요. 자신들도 팁을 바란게 아니라 그저 외국인이라서 순수한 생각으로 친절을 베푼 것 같은데 내가 작은 금액일지라도 돈을 건네는 바람에 이들을 당황하게 만든거 같다. 찬차르 마을을 벗어날 때 까지 이들의 순수한 맘을 헤아리지 못하고 돈을 주게 되어 앞으로 이들이 외국인을 안내하고 돈을 바라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막심한 후회감에 사로잡힌다.